
1791년 조선 — 진산 사건과 천주교 박해의 서막
1791년은 조선 천주교 역사에서 전환점이 된 해이다. 충청도 진산에서 발생한 ‘진산 사건’은 단순한 지방 분쟁이 아니라, 조선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을 이유로 공식적인 사형 집행이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이 일은 이후 신유박해(1801)와 기해박해(1839) 등 대규모 박해의 서막을 여는 신호탄이 되었다.
정조 치세의 한가운데였던 이 시기는 문화와 학문이 융성했지만, 동시에 사상적 충돌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천주교는 평등사상과 서양 문물 수용이라는 혁신적 요소로 인해 하층민뿐만 아니라 일부 양반층과 지식인층에까지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유교적 예법을 근본으로 하는 국가 체제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사건의 발단
진산 사건은 충청도 진산에 사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운 일에서 비롯됐다. 천주교 교리에 따라 조상 숭배를 우상 숭배로 간주한 그들은 제사를 폐지하고 대신 미사를 드렸다. 당시 유교적 예법을 근본으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이는 ‘패륜’으로 간주됐다.
이 소식은 곧 조정에 보고되었고, 정조는 신하들의 강력한 처벌 요구를 받았다. 조정 내부에서는 서학에 호의적인 소수파와, 이를 국가 기강을 해치는 위험 사상으로 보는 다수파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사람이 부모를 섬기지 않으면, 나라를 섬길 수 없다.” — 당시 유생의 상소문 중
체포와 재판
윤지충과 권상연은 곧 체포되어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조상 제사 거부가 신앙의 본질임을 주장했다. 이는 조정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정조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처벌을 검토했으나, 보수파의 거센 압박 속에 두 사람을 참수형에 처하는 결정을 내렸다. 1791년 12월, 조선 최초의 천주교 순교가 이루어졌다.
정치적 파장
진산 사건은 단순히 종교 문제를 넘어 정치적 의미를 지녔다. 보수파는 이를 계기로 서학 확산을 억제하고, 개혁적 사상을 탄압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반면, 개혁파는 이러한 탄압이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억누른다고 비판했다.
정조는 개혁군주였으나, 왕권 유지를 위해 보수파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이후 서학 탄압이 제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학은 외래의 종교가 아니라, 백성을 위로하는 도리다.” — 서학 신자의 증언
사회적 반응
진산 사건 이후, 지방에서는 천주교 신자에 대한 감시와 신고가 강화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사적인 원한을 해결하기 위해 천주교 혐의를 조작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이로 인해 억울한 희생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동시에 천주교는 더 깊이 숨어들어 비밀리에 확산되었다. 특히 여성과 천민 계층에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는 훗날 대규모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다.
국제 정세와 연계
1791년 당시 중국과 베트남, 일본 등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도 서양 종교와의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카오를 거점으로 한 선교사들은 조선의 상황을 주시했고, 진산 사건 소식은 빠르게 서양에 전해졌다.
이 소식은 19세기 중엽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진입하는 명분 중 하나가 되었으며, 훗날 병인양요와 같은 국제적 충돌의 역사적 뿌리가 되었다.
비하인드 스토리
기록에 따르면,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 직전 마지막으로 나눈 말은 “하늘의 뜻은 칼로 끊을 수 없다”였다고 한다. 이 말은 훗날 천주교 공동체에서 신앙의 표어처럼 전해졌다.
또한, 사건을 다룬 관리 중 일부는 은밀히 천주교 교리를 탐구하며 훗날 신자가 되었다는 전언도 있다. 이는 박해가 역설적으로 사상의 확산을 자극한 사례로 꼽힌다.
역사적 의의
- 조선 최초의 천주교 순교 사건
- 유교 예법과 서학의 정면 충돌
- 이후 대규모 박해의 제도적 기반 마련
- 조선 사회 사상 통제 강화
1791년 주요 사건 연표
연·월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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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10 | 윤지충, 권상연 위패 소각 사건 발생 |
1791.11 | 두 인물 한성 압송 및 재판 |
1791.12 | 윤지충, 권상연 참수형 집행 |
1791.12 | 전국적으로 천주교 감시 강화 |
1791.12 | 비밀 천주교 공동체 형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