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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년 조선 — 청과의 외교와 서양 문물의 유입

1787년 조선 — 청과의 외교와 서양 문물의 유입

1787년 조선 — 청과의 외교와 서양 문물의 유입

1787년은 조선 후기 외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해였다. 이 시기 조선은 청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한편, 의도치 않게 서양 문물과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특히 북경을 방문한 연경사(燕京使) 사절단은 조선과 청 사이의 외교 의례를 수행했을 뿐 아니라, 당시 청나라 수도에 상주하던 서양 선교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천문학 기구, 서양 지도, 천주교 교리서 등 다양한 물품과 지식을 들여왔다. 이러한 경험은 조선 지식인들의 시야를 넓히고, 실학과 과학 기술 발전에 자극을 주었으며, 동시에 유교적 질서에 대한 도전의 씨앗을 뿌렸다.

정조 시대의 외교 환경

정조 치세 중반부는 정치적 안정 속에서 문화와 학문이 융성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국경 안정과 청나라와의 우호 관계 유지를 최우선 외교 과제로 삼았다. 청은 조선의 종주국이었기 때문에, 정기적인 사절단 파견은 외교적 예를 다하는 중요한 절차였다. 연경사는 매년 혹은 격년으로 파견되었고, 1787년의 연경사 역시 왕명을 받들어 청의 황제에게 문안 인사를 전하고, 국경 문제와 무역 관련 논의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사절단은 북경에서 다양한 인물과 물품을 접했다. 당시 청나라 황궁에는 예수회 소속 서양 선교사들이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그들은 천문학·수학·지리학·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했다. 조선 사신들은 공식적인 외교 업무가 끝난 뒤, 은밀하게 이들과 접촉해 서양 문물과 지식을 구입했다.

연경사의 활동과 서양 문물 획득

1787년 연경사에는 학문에 관심이 깊은 문신과, 청어와 서양어에 능통한 역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서양 선교사로부터 세계지도, 천문 관측 기구, 서양 시계, 그리고 천주교 교리서를 구입했다. 이 물품들은 귀국 후 규장각에 보관되거나 일부 학자들에게 전달되었다. 특히 세계지도는 한 장의 종이에 전 세계의 대륙과 바다, 주요 도시가 표시되어 있어,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조는 이 물품 중 과학 기기와 지도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규장각 학자들에게 분석과 연구를 명했다. 천문학 기구는 역법 개정과 기상 관측에도 활용될 수 있었고, 서양 시계는 그 정밀함으로 조정의 시간을 맞추는 데 참고되었다.

“이 기계는 하루의 길이를 눈으로 보게 하고, 하늘의 운행을 손으로 재게 한다.” — 1787년 규장각 보고서

천주교 서적의 유입과 파장

천주교 교리서의 유입은 조선 사상계에 잠재적 변화를 불러왔다. 당시 일부 사신과 역관은 천주교가 단순한 종교를 넘어 서양의 학문과 철학을 담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교리서 속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주목했는데, 이는 신분제 사회인 조선의 기존 질서와 충돌할 소지가 있었다.

정조는 이 서적의 종교적 성격 때문에 공개적인 연구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일부 개혁 성향의 학자들은 개인적으로 이를 탐독하며 사상적 자극을 받았다. 훗날 1791년 진산 사건과 1801년 신유박해는 이때 유입된 사상과 교리가 뿌리 깊게 자리잡은 결과이기도 했다.

사회적 반응

한양의 젊은 학자들은 서양 문물의 정밀함과 새로운 세계관에 매료되었다. 천문학 기구와 지도는 그들에게 유학 경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넓음을 보여주었다. 반면, 보수파 유림은 서학 서적과 기기를 ‘이적의 물건’으로 규정하며 거부감을 표했다.

지방에서는 서양 문물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졌지만, 직접 접할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대신 장터와 서당에서 ‘청나라에서 들여온 신기한 물건’에 대한 이야기들이 구전되며, 서학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국제 정세와 연결

1787년의 국제 정세는 조선에 서양 문물이 들어올 수 있는 배경을 제공했다. 청나라는 서양과의 교류에 점진적으로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고, 북경에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황제의 기술顾问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조선 사신단은 공식 외교의 틀 안에서 비교적 쉽게 서양 문물에 접근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조선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높아지고 있었다. 일부 서양 선교사와 상인들은 조선을 ‘동아시아의 숨은 왕국’이라 부르며, 언젠가 직접 접촉하길 희망했다.

비하인드 스토리

연경사 일행 중 한 역관은 북경에서 구입한 서양 시계를 몰래 분해해 그 구조를 분석했다. 그는 기어의 맞물림과 태엽의 원리를 이해한 후, 귀국길에 조심스럽게 다시 조립해 조정에 바쳤다. 이 시계는 오랫동안 규장각의 보물로 보관되었고, 일부 기술은 조선 장인들에게 전해져 모방품 제작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당시 사신단의 일부는 천주교 서적을 몰래 숨겨 귀국했는데, 공식 기록에는 전혀 남기지 않았다. 이 서적들은 학자들의 개인 서재에 보관되며 은밀히 필사되었고, 훗날 조선 천주교 확산의 불씨가 되었다.

역사적 의의

  • 조선 후기 서양 문물 수용의 가속화
  • 실학과 과학 기술 발전의 촉진
  • 천주교와 서학 사상의 전초 유입
  • 조선 지식인의 세계관 확장
  • 유교 중심 질서에 대한 잠재적 도전

1787년 주요 사건 연표

연·월 사건
1787.1 연경사 사신단 파견, 북경행 출발
1787.3 서양 선교사와 접촉, 천문학 기구·세계지도·시계·서학 서적 구입
1787.5 조선 귀국, 규장각에 서양 기기와 지도 보관
1787.8 한양 지식인 사이에서 서학 서적 비밀 독서 모임 발생
1787.12 보수파 유림, 서학과 서양 기물 수용 반대 상소 제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