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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신미양요와 조선의 외세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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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신미양요와 조선의 외세 대응

1871년 신미양요와 조선의 외세 대응

1871년은 조선이 서양 열강의 군사적 압박과 직접 맞닥뜨린 해였다. 이 해 6월, 미국은 군함을 앞세워 강화도 해역에 진입했고, 조선군과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로 불리며, 조선과 미국 간의 최초의 무력 교전이자, 조선의 쇄국정책이 시험대에 오른 역사적 순간이었다. 사건의 명칭에서 ‘신미’는 1871년의 간지, 즉 신미년에 벌어진 일을 뜻한다.

사건의 배경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미국과 조선의 관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가 무역을 시도했으나, 조선 당국은 이를 불법 침입으로 간주했다. 선박은 결국 조선군에 의해 불태워졌고, 선원 전원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미국이 조선에 무력 보복을 검토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즉각적인 대응이 어려웠다.

1870년대 들어 미국은 아시아 시장 확대를 위해 조선과의 교섭을 재개하려 했다.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사과와 배상, 그리고 통상 조약 체결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 군사력을 동원할 준비를 했다. 당시 조선은 병인양요 이후 프랑스 함대를 격퇴한 경험으로 인해, 서양 함대의 위협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이런 양측의 입장 차이는 결국 충돌로 이어졌다.

“우리는 문을 닫고 있지만, 결코 겁먹지 않았다.” — 당시 조선 조정의 입장

미국 함대의 강화도 진입

1871년 5월,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은 군함 5척과 약 1,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 해역에 나타났다. 이 함대에는 최신식 함포와 무기, 그리고 해병대가 탑승해 있었다. 로저스 제독은 조선 정부에 공식 외교 사절임을 통보하며, 통상 교섭과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외국 군함의 무단 진입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강화도 해협의 진로를 차단했다.

미국 함대는 조선의 해도와 해안을 측량하는 ‘정찰 활동’을 벌였지만, 조선 입장에서는 명백한 군사적 도발이었다. 이에 조선 수비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에서 경고 사격을 가했다. 미국은 이를 공격 행위로 간주하고 본격적인 군사 작전에 돌입했다.

전투의 전개

1871년 6월 10일, 미국 함대는 강화도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포로 포격한 후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미군은 조선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광성보로 진격했다. 6월 11일 벌어진 광성보 전투는 신미양요의 최대 격전지였다. 약 350명의 조선군이 장교 어재연의 지휘 아래 결사 항전을 벌였다. 어재연 장군은 ‘수’를 새긴 깃발을 들고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했고, 광성보는 함락되었다.

“조선의 군인은 죽어도 물러서지 않는다.” — 미군 장교의 전투 후 보고서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 약 350명 중 대부분이 전사했으며, 미군도 사상자를 냈지만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조선군의 무기는 주로 화승총과 창, 활이었고, 미군은 최신식 소총과 함포로 무장해 전력 차이가 컸다.

전투 이후

미국은 광성보를 점령했지만, 조선 조정이 협상에 응하지 않자 더 이상의 진격을 중단했다. 미국 측은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의 통상 조약 체결이나 제너럴셔먼호 사건 해결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6월 12일, 미국 함대는 강화도에서 철수했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조선 정부는 이번 사건을 ‘서양의 무력 침략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것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실상은 미국의 군사력 앞에서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고립을 더욱 심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비하인드 스토리

전투 당시 어재연 장군이 들었던 ‘수’자 깃발은 훗날 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갔고, 한 세기 넘게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2007년 대한민국에 반환되었다. 이 깃발은 지금도 조선군의 결연한 항전을 상징하는 유물로 남아 있다.

또한 미국 함대는 조선 해안을 측량한 지도를 본국으로 가져갔는데, 이는 훗날 서양 열강이 한반도를 이해하고 개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조선군 입장에서는 외세의 지리 정보 수집을 막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역사적 의의

  • 조선과 미국 간 최초의 무력 충돌
  • 서양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 과정에서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 부각
  • 쇄국정책 강화와 외교적 고립 심화
  • 조선군 항전의 상징인 ‘수’자 깃발

1871년 신미양요 연표

연도/날짜 사건
1866 제너럴셔먼호 사건 발생
1871.5 미국 함대 강화도 해역 진입
1871.6.10 초지진·덕진진 포격, 광성보 전투 개시
1871.6.11 어재연 장군 전사, 광성보 함락
1871.6.12 미국 함대 철수, 신미양요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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