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외교사 (6) 썸네일형 리스트형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과 조선 정치의 격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과 조선 정치의 격변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 왕궁 경복궁 내 건청궁에서 벌어진 사건은 조선 사회를 극도의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명성황후, 즉 민씨는 일본인 낭인과 일본군, 그리고 친일파 내각의 지원을 받은 세력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을미사변’으로 불리며, 조선 정치사뿐 아니라 한일 관계사에서 가장 어두운 장면 중 하나로 기록된다. 당시 조선은 청일전쟁 이후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과 러시아, 청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외교 무대 위에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는 단순한 궁중 암살이 아니라, 조선의 외교적 방향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국제 정치 사건이었다.사건의 배경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 1871년 신미양요와 조선의 외세 대응 1871년 신미양요와 조선의 외세 대응1871년은 조선이 서양 열강의 군사적 압박과 직접 맞닥뜨린 해였다. 이 해 6월, 미국은 군함을 앞세워 강화도 해역에 진입했고, 조선군과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로 불리며, 조선과 미국 간의 최초의 무력 교전이자, 조선의 쇄국정책이 시험대에 오른 역사적 순간이었다. 사건의 명칭에서 ‘신미’는 1871년의 간지, 즉 신미년에 벌어진 일을 뜻한다.사건의 배경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미국과 조선의 관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가 무역을 시도했으나, 조선 당국은 이를 불법 침입으로 간주했다. 선박은 결국 조선군에 의해 불태워졌고, 선원 전원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미국이 조선에 무력 보복을 .. 1896년 아관파천과 조선 정치의 대전환 1896년 아관파천과 조선 정치의 대전환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세자(훗날 순종)는 궁궐을 빠져나와 한성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 사건은 ‘아관파천’이라 불리며, 조선 정치사에서 매우 큰 전환점이 되었다. 아관파천은 일본의 정치적 간섭과 위협 속에서 고종이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고 국정을 재정비하기 위해 취한 극단적인 조치였다.배경에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이 있었다. 일본은 조선 내 친일 내각을 유지하기 위해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했고, 이는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명성황후가 일본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된 후,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크게 느꼈다. 게다가 을미개혁의 강제 시행으로 단발령과 군제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국내 반발이 거세졌다. 특히 의병 봉기가 전국적으로 .. 1876년 강화도조약과 조선의 개항 1876년 강화도조약과 조선의 개항1876년은 조선 역사에서 대전환점이 된 해였다. 바로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체결로 인해 500여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조선의 쇄국정책이 사실상 종료되고, 근대 국제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조선과 일본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동시에 불평등 조약이기도 했다. 일본은 자국의 군사력과 외교력을 앞세워 조선을 개항시켰고, 이는 이후 조선의 주권과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강화도조약의 배경에는 일본의 근대화와 대륙 진출 야욕이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양의 군사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여 급속한 산업화와 군사력을 강화했고, 조선을 그들의 세력권에 포함시키려 했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은 이런 일본의 의도를 .. 1881년 신사유람단 파견과 조선의 근대화 모색 1881년 신사유람단 파견과 조선의 근대화 모색1881년, 조선은 전통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개화 세력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일본에 강제로 문호를 개방했고, 일본을 통해 서양 문물이 빠르게 유입되기 시작했다. 일부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의 변화가 조선에도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반대로 보수파는 서양 문물과 제도의 도입이 전통과 왕권을 훼손할 것이라 우려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종은 청나라의 권유와 일본의 초청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위한 공식 시찰단인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신사유람단의 파견은 조선 역사에서 최초로 정부 주도의 근대 문물 조사였으며, 단순한 외교 방문이 아니라 일본의 정치, 경제.. 1885년 거문도 사건과 조선의 국제 외교 위기 1885년 거문도 사건과 조선의 국제 외교 위기1885년,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 그리고 영국이라는 열강들 사이에서 심각한 외교적 위기를 맞이했다. 그 중심에는 전라남도 거문도가 있었다. 거문도 사건은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 영토인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한 사건으로, 2년여간 지속되며 조선의 국제적 입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19세기 후반은 ‘제국주의 경쟁 시대’였다. 영국은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로 지배하며 세계 최강국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러시아는 남하 정책을 추진하며 극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를 거점으로 조선과 대한해협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었는데, 이는 영국의 인도 항로와 중국 남부 진출 계획에 위협이 되었다.. 이전 1 다음